조선 왕 계보 순서 - 태정태세문단세 3번째 태종 이방원 업적
태종 이방원 간략하게 정리
조선 제3대 왕(재위 1400~1418). 아버지인 이성계 휘하에서 구세력 제거에 큰 역할을 하였으나 세자 책봉에 불만을 품고 정도전 등을 살해하는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방원(태종)의 즉위는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겪으며 골육상잔의 비극 후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명분과 정통성에 하자가 있었다. 이에 태종은 즉위 후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고, 왕권 강화를 통한 국왕 중심의 통치체제를 정비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태종 이방원의 생애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 유덕(遺德)이고 휘는 방원(芳遠)이다. 태조의 5남으로 어머니는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이고 비는 민제(閔霽)의 딸 원경왕후(元敬王后)이다. 1382년(우왕 8)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이 되고, 후에 아버지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신진정객(新進政客)들을 포섭하여 구세력의 제거에 큰 역할을 하였다.
1388년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오고, 1392년(공양왕 4) 정몽주(鄭夢周)를 제거하여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의 기반을 굳혔으며, 같은 해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로서 등극(登極)하자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다. 태조가 이모제(異母弟)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1398년(태조 7) 중신(重臣)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등을 살해하고, 이어 강씨 소생의 방석, 방번(芳蕃)을 귀양보내기로 하고, 도중에 죽여 버렸다. 이것을 제1차 왕자의 난이라 하며 방원은 이때 세자로 추대되었으나 이를 동복형(同腹兄)인 방과(芳果:定宗)에게 사양하였다.
1400년(정종 2) 넷째 형인 방간(芳幹)이 박포(朴苞)와 공모하여 방원 일당을 제거하려 하자, 이를 즉시 평정하고 세제(世弟)에 책봉되었다. 방간, 박포의 난을 제2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제2차 왕자의 난이 평정된 후 정종의 양위(讓位)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하자 사병을 혁파(革罷)하고 1402년(태종 2) 문하부(門下府)를 폐지하였으며 의정부(議政府)를 설치하였다. 또 낭사(郞舍)는 사간원(司諫院)으로 분립시켰으며, 삼사(三司)는 사평부(司平府)로 개칭하고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신설하였으며, 1405년 1월에는 의정부의 서무(庶務)를 육조(六曹)에서 분장(分掌)하게 하는 등, 관제개혁을 통하여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였다.
한편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강화하여 전국의 많은 사찰(寺刹)을 폐쇄한 후, 그 사찰에 소속되었던 토지, 노비를 몰수하였으며, 또 비기(秘記), 도참(圖讖)의 사상을 엄금하여 미신타파에 힘썼다. 한편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하여 양반, 관리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국민 모두가 이를 소지하게 함으로써 인적 자원(人的資源)을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며, 개가(改嫁)한 자의 자손은 등용을 금지하여 적서(嫡庶)의 차별을 강요하였다.
국방정책으로서 10년 여진족의 일파인 모련위(毛憐衛) 파아손(把兒孫)의 무리를 죽였고, 노략질이 심한 야인(野人:여진인)들을 회유하여 변방의 안정에도 힘을 기울였다. 또 문화정책으로서 주자소(鑄字所)를 세워 1403년(태종 3) 동활자(銅活字)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으며, 하륜(河崙) 등에게 《동국사략(東國史略)》《고려사(高麗史)》 등을 편찬하게 하였다. 경제정책으로서 호포(戶布)를 폐지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었고, 저화(楮貨)를 발행하여 경제유통이 잘 되도록 유의하였다.
1402년(태종 2) 상하 국민의 남소(濫訴), 월소(越訴)를 엄금하였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기 위하여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였는데, 그 뜻은 매우 좋은 것이었으나 뚜렷한 실효는 거두지 못하였다. 고려 말기의 순군제도(巡軍制度)를 여러 차례 개편하여 최고의 법사(法司)인 의금부(義禁府)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국왕 직속의 근위대(近衛隊)로서 모역(謀逆)을 방지하는 기관이었다.
1404년 송도(松都)에서 한성(漢城)으로 천도하였으며, 1418년 세자(世子:世宗)에게 선위(禪位)하고 상왕(上王)으로서 국정을 감독하였다. <백과사전>
태종 이방원이 임종할 때 셋째 아들인 세종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다. 그리고 그의 유언대로 오늘날 세종은 어질고 현명한 임금으로, 태종은 피비린내 나는 왕권쟁탈전을 거쳐 권좌에 오른 피의 임금으로 역사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에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워 낸 세종의 위대한 업적은 아버지 태종의 집념이 빚어낸 피와 땀의 결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왕권을 획득해 후대에 부정적으로 비치고 있는 것이 역사의 현실이다.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세운 위대한 임금의 아들로서 그리고 어진 임금의 아버지로서 소설보다 더욱 흥미로운 삶을 살다간 태종은 퍽이나 매력적인 인물이다. 더구나 21세기를 바라보는 오늘의 정치현실이 그때와 유사함을 볼 때 자못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세 권 분량의 소설로 구상하게 된 것이다.
변방 신흥 무장의 아들로 태어나 권문세가의 후예들로부터 신분적 좌절을 맛본 이방원은 위화도 회군에 성공한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살해하고 ‘조선’이라는 새 왕조를 세우는 데 공헌한다. 그 후 1, 2차 왕자의 난을 통해 형제를 비롯한 친인척, 조정 공신들을 살해하거나 귀양 보내는 등 차례로 정적들을 없애고 마침내 조선 3대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태조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왕세자 방석을 죽이고 태조가 믿고 의지하던 정도전마저 죽임으로써 아버지의 미움을 사 끝까지 화해하지 못한 채 왕권 확립에만 몰두하다 의리를 지키되 왕권에 도전하는 사람은 가차없이 처단하는 결단력 이면에 인간적인 나약함이 있었던 걸까? 태종의 여성편력은 열두 명의 부인을 거스리고 슬하에 12남 17녀를 둔 데서도 잘 알려져 있다.
아버지를 도와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졌으나 끝내 버림 받은 뒤 아들에게 어진 임금을 당부하며 죽어간 고독한 임금 태종 이방원!
역사의 침묵을 깨고 현대로 걸어나온 한 인물을 통해 오늘의 삶을 되새겨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자부한다.
<작가의 말>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소설 <태종 이방원>은 태종 이방원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다.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잔혹하고 집념이 강했던 이방원 대신 인간 이방원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개국의 주역이면서 500년 조선 왕조의 기반을 다진 태종 이방원!
고려 말 조선 초, 묵은 권력이 흔들리고 새 권력이 솟아오르는 역사의 전환기!
나라의 어려움이나 민심은 아랑곳없이 세력 다툼에만 매달리는 조정 대신들, 어지러운 정국의 벼랑에서 수많은 정적들을 하나하나 제거하고 대망의 권자에 오른 뒤 강력한 왕권정치를 실현시킨 태종 이방원!
신권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켜 이루고자 했던 이방원의 통치철학은 무엇이었으며 비정한 정치세계에서 고뇌해야 했던 그의 인간적 아픔은 어떤 것이었을까?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돌고 도는 사건들을 통해 현대 한국 정치의 현주소를 조명할 수 있다.
태종의 주요 정책과 업적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통해 개국공신 세력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국왕 중심의 통치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1414년(태종14) 6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단행해 '왕-의정부-육조' 체제이던 국정을 '왕-육조'로 전환했고, 언론 기관인 사간원을 독립시켜 대신들을 견제하였다.
또한 양전 사업과 호구 파악에 노력을 기울여 호패법(유민 방지, 국가 자원 확보)을 실시하였고, 사병을 혁파해 병권을 일원화시키고 군사력을 강화했다. 아울러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강화하여 전국의 많은 사찰을 폐쇄하고, 서얼차대법(서얼은 문과에 응시 안됨), 재가금지법(부녀자의 재혼 금지) 등 유교원리를 법제화시켰다. 이 밖에 신문고를 설치하여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자유롭게 청원할 수 있도록 하였으나 널리 활용되지는 못했다.
태종 시기 주요 사건과 인물
1. 한양으로 다시 천도
건국 초에 조선 조정은 세 번에 걸쳐 수도를 옮기는데, 태조 3년에 개경의 기운이 다 됐다는 이유로 한양으로 천도했다가 1398년 정종 원년에는 개경으로 다시 왕궁을 옮겼다. 이방원은 태종으로 등극하자마자 태조의 뜻을 이어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려 했으나, 신하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해 실행치 못하다가 1404년(태종5) 9월에 경복궁이 준공되자 한양 천도를 단행하였다. 이후로 한양은 500년 동안 조선의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2. 민무구 형제의 옥
조선 초기 태종과 정비 원경왕후 민씨와의 불화로 인해 원경왕후의 동생들인 민씨 형제가 차례로 화를 당한 사건을 말한다. 원경왕후 민씨는 태종 집권 이전에는 남편의 등극에 많은 역할을 했지만, 태종이 보위에 오른 후 잉첩들만 가까이 하자 이에 심한 투기심을 드러내 태종과의 불화가 잦았다. 이러한 와중에 아버지 민제와 왕비인 원경왕후의 권세를 믿고 활개를 치던 외척세력인 민씨 형제들이 탄핵을 받게 되었다.
옥이 발생한 후 민무구 등은 여흥에 유배됐으며, 태종은 1413년 이들에게 자진(自盡)하도록 하였다. 민무구, 무질 형제가 죽은 후 그의 형제들이 형들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태종은 무휼, 무회 형제도 사사(죽일 죄인을 예우하여 사약을 내려 자결하게 하는 것)시킴으로써 민씨 일가의 옥사는 종결되었다.
3. 하륜(1347∼1416)과 이숙번(1373∼1440)
하륜(河崙)은 제1차, 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운 인물로 태종이 즉위하면서 권력의 실세로 군림했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제도 개편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우선 6조직계제를 도입하여 각 판서들의 권한을 강화하고 왕에게 업무를 보고하게 만들었으며, 재상의 권한을 축소하였다. 또 저화(楮貨)를 발행하여 재정의 확충을 도모하였고 신문고를 설치하여 백성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물론 이첨과 함께 《동국사략》을 편수하였다.
이숙번(李叔蕃) 역시 제1차, 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운 인물로 1406년부터 여러 군사요직을 두루 거친 뒤 1413년에 병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공이 워낙 큰 것에 자만하면서 탄핵을 받아, 1417년 경상도 함양에 유배되었다.